장애인 날
늘샘 초희
1981년 부터 나라에서 "장애인의 날"로
정하고 기념행사를 해오고 있다
4월 20일을 "장애인의 날"로 정한것은
4월이 1년 중 모든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이어서
쟝애인의 재활의지를 부각시키는 의미가
담겼다고 한다.
그리고 장애인 복지법이 1989년 12월 30일 날
시행령이 개정 발효되었다
((장애인 복지법))제 14조에 의거 4월 20일을
법정 기념일로 장애인의 날로 정하였으니
올 해로 41회 째를 맞이했다
이제 정부가 국민이 장애인에게 관심을
기울이지만 아직도 울 나라 문화와 정서는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사라지진 않았다
그런데 어쩌랴
선천적으로 또 질병과 사고로 장애인의 멍에를
지게된다면 ~~~~~~고로 우린 준 장애인이
아난가?
누구도 너는 이 세상을 다하는 날까지 정상인으로
살아도 된다는 보증을 받은 이가 있을까?
그러니 편견을 버리고 이상한 눈길로 장애인을
바라 보지 말아야 한다.
국 내외 적으로 장애를 극복한 인물들을 보라
3중고의 고통 속에서도 세게적인 우먼파워가 된
헬랜캘러 여사릏 비롯 꼽으라면 많은 인물들을
열거할 수 있다.
아래 글을 소개하면서 우리의 시선이 생각이
따뜻해지기를 소망해본다.
사실 사람마다 단점이 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떻게 보면 그 단점을 부각한다면 어떤
그 부분에는 장애가 아닐까?
얼마 전에 3주 동안 필자에게 치료를 받고
돌아간 칠순이 넘은 한 어머니가 계셨다.
몸은 말이 아니었다.
부종도 그렇지만,
그녀는 나이 탓이라 말했다.
그러나 몸에 나타난 현상은 한(恨)어 있어서
화병으로 온몸이 울퉁불퉁 멍울져 있었다.
치료를 시작한 지 몇 날이 지나고 마음의
대화를 하는 도중,
그녀에게 50살이 가까운 정신장애를 가진
아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른 자녀는 출가하여 자녀를 낳고 잘살고 있지만,
언제나 그녀의 마음에는
그 아들이 가슴에 맺혀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장애아를 둔 부모의 마음이 아니겠는가.
외국의 사례를 하나 들까 한다.
울드 부부에게 말을 하지 못하는
정박아 자녀가 있었다.
울드 부부는 1967년에 그들의 다섯 살 난
「아더」라는 아들이 정박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울드 부부는 아이가 가족들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또 그 사랑에 보답하지도 못할 테지만 아이를
정박아 수용소가 아닌 집에서 키우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보답을 바라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생각에서였다.
울드 부부는 될 수 있으면 아이를 정상인처럼
대하려고 노력했다.
일요일에는 교회도 데려가고 평일에는
특수학교를 보냈으며 일부러 많은 사람과 만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아이는 여전히 바보처럼 웃기만 했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어느새 열여덟 살이 된 아더, 울드 부부는
그동안 아들을 장애아 학교에 보내고 장애아들이
모여서 일하는 작업장에도 보냈다.
그러나 아더는 가족들과 함께
지내는 것을 더 좋아했다.
1991년 아더는 20대 후반의 건장한 청년이 되었다.
아더는 장애인 작업장에서 단순한 전자 장비를
조립하는 일을 배우고 있었다.
어느 날 「캐럴」이라는 새로운 책임자가 이곳에
발령되었는데 그녀는 아더에게서 어떤 숨은 힘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곧 아더에게 컴퓨터로 의사소통 법을 가르쳤다.
그것은 몇 년 동안 계속되었는데,
캐럴은 아더가 매우 똑똑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이 사실을 울드 부부에게 알리기 위하여
그들을 작업장으로 불렀다.
그리고 아들이 어렸을 때부터 주변 환경을 조금씩
이해하고 있었음을 증명해 보였다.
캐럴이 먼저 아더에게 '
오늘 기분이 어떠냐?'고 컴퓨터 자판으로 물었다.
그러자 아더의 손가락이 아주 천천히,
힘들게 움직였다.
컴퓨터 화상에 알파벳 한 글자 한 글자가 떠올랐다.
아더가 한 문장을 만드는 데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마침내 29년간의
침묵 끝에 아더의 마음이 완성되었다.
"이제 어머니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게 되어 행복합니다.
" 울드 부부는 울고 있었다.
장애아를 가진 부모들은 스스로 체념을 하고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산다.
문제는 이제 우리 사회도 이런 가정을 위해
정책적으로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사회는 선천적 장애보다 후천적 장애인이
더 많이 발생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 말은 장애인이 된다는 것은 남의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그리고 가정 구성원 중에 장애인이
발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복지는 바로 우리 가정의 문제라는
인식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복지는 더 열악한 조건에 있는 자들에게
우선되어야 한다.
일선 관공서에는 실태 파악부터 다시 해야 한다.
또한,
일선에서는 정부의 보조에만 목을 맬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여론조성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며, 그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공공단체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지역
복지 전문가들이 앞장서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비장애인들이 사회적 약자인 장애인 복지라는
명분으로 오히려 장애인들을 이용하여
그들의 인권과 존엄에 피해를 주는 이들이 있다는
매스컴을 대할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 옴을 느낀다.
복지의 기본에는 여러 가지 정책과 기금마련이
중요하다.
포퓰리즘적인 정책을 버리고 실제로 도움이 되는
정책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낭비가 없도록 기관단체에서는 이중삼중의
감시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
아동복지나
노인복지나
교육복지,
민생복지,
이 모든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회적 약자에
속한 장애인 복지 정책이 더 중요하다.
바라옵건대, 장애인들이
참으로 “사랑합니다.” “행복합니다.”라는 말이
고백 되는 복지정책이 되었으면 한다.